역사, 왜 공부하세요? 역사비평

증여론
마르셀 모스 지음, 이상률 옮김 / 한길사
나의 점수 : ★★★★





지식인을 위한 변명

장 폴 사르트르 지음, 박정태 옮김 / 이학사
나의 점수 : ★★★★




대학원에 진학해서 역사를 계속 공부하겠다고 선언하면, 청중들의 반응은 위와 같은 질문으로 시작된다. 어떻게 대답해야할까. 대답하는 입장에서 당장 떠오르는 것은 하나이다. '재미'. '재미'가 없다면 아무리 그 뜻이 높고 크더라도, 한자와 일본어가 뒤섞인 통계자료를 밤새 분석하고 또 한문이 가득한 고서적들을 땀 흘리며 뒤적이겠는가. 그럼 이 '재미'를 어떻게 언어로 표현할까. "제가 역사에 흥미가 많아서요.", "제가 잘 할 수 있는 공부인 것 같아요." 등등이 있겠다. 이처럼 '재미'라는 개념의 범주가 생각보다 넓은 만큼 다양하게 대답할 수 있고 또 그렇게 대답해왔지만, 돌아오는 반응은 단 한 가지다. "집에 돈이 많으신가보네요."

이와 같은 반응을 접하게 되면, 질문에 대답하기 위해 '재미'를 어떻게 해석하고 표현해낼 것인가 하는 고민 따위는 아예 필요가 없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 역사를 왜 공부하느냐는 상대의 첫 질문은 '왜'보다는 '어떻게'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이다. 공부하는 동안 생계는 어떻게 할 것이며, 그 많은 대학원등록금은 어떻게 할 것인지를 묻는 것이다. 여기에 '재미'라고 대답했으니 돈 걱정 없이 자기 하고 싶은 것이나 맘대로 하고 사는 놈으로 보일 수밖에.

그랬으면 좋겠다. 그런데 정말 '그런 놈'이었다면 그 질문과 이어진 반응에 불편함을 느끼지도 않았을 것이고, 이 글도 싸지르고 있지 않았을 것이다. 대체 왜 불편할까? 언어에 따른 오해 때문이라고만은 볼 수 없다. 대학과 대학원을 계속 다닐 수 있고, 의식주의 균형이 깨져서 생명에 심각한 위협을 느끼지 않을 정도의 경제력이 뒷받침될 때, 대학원에도 진학할 수 있고 사회에서 인정하는 학위도 안정적으로 받을 수 있다. '많다'라는 것이 어느 정도인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집안의 경제력이 있기 때문에 대학원 진학과 앞으로의 공부가 가능한 것은 사실이다. 장 폴 사르트르는『지식인을 위한 변명』에서 이 불편함을 지식인이 필연적으로 느낄 수밖에 없는 모순으로 설명한다. 물론 사르트르는 지식인을, 일정 분야에 대한 전문지식을 지닌 전문가 중 하나로 정의하고 있기 때문에 글쓴이와 같은 학부생 나부랭이는 지식인에 포함되기에 여러 모로 모자라다. 하지만 글쓴이가 전문가, 지식인을 꿈꾼다는 점에서 크게 맥락을 벗어나지는 않을 것 같다.

『지식인을 위한 변명』에 드러난 사르트르의 관점을 확대해보자면, 이른바 근대에 이루어진 학문들의 분과는 부르주아가 자신들의 지배를 공고히 하기 위해 필요한 지식들을 전문화시킨 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부르주아에 의해 전문화된 분야에 종사하는 전문가가 한 사회의 지식인으로서 등장할 수 있다. 역사를 다루는 역사학도 근대 분과학문의 하나라는 점에서 예외는 아니며, 따라서 역사가도 한 사회의 지식인이 될 수 있다. 그러나 한 분야의 전문가라고 해서, 반드시 지식인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르트르는 전문가가 계급론적 관점에서,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의 중간계급, 즉 프티 부르주아의 위치에 있다고 본다. 전문가는 아무 것도 생산하지 않고 프롤레타리아가 생산하는 잉여 가치에 의존하는 그야말로 '잉여'들이기 때문에 그 스스로 착취하는 자이면서도, 동시에 지배계급, 부르주아가 필요로 하는 전문지식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착취당하는 자이다. 사르트르는 전문가들이 자신의 분야에서 얻는 지식과 프티 부르주아라는 계급적 이해관계가 충돌할 때, 그 모순을 느끼고 극복하려는 전문가만이 지식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다고 말한다.

사르트르는 전문가들이 얻는 지식이 부르주아가 지배하는 사회의 '특수성'을 폭로함으로써 전문가가 스스로 지닌 모순을 드러내게 한다고 본다. 부르주아는 자신들이 지배하는 사회가 마치 보편적인 사회인 것처럼, 인류가 마땅히 추구해야할 사회인 것처럼 묘사하지만, 전문가들의 연구에 의해 그 '보편성'을 상실한다. 앞서 말했듯이 전문가들은 부르주아의 필요에 의해 생겨났지만, 그런 전문가들이 연구를 통해 부르주아 사회가 지닌 '보편성'의 '특수성'을 포착하는 셈이다. 사르트르가 주로 언급하는 자본주의가 좋은 예이다. 자본주의는 마치 '보편성'을 지닌 듯이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려고 하고 또 하고 있지만, 자본주의는 역사적 구성물의 하나일 뿐이다. 여기에서 전문가들은 자본주의가 내세우는 '보편성'에 내포된 '특수성'을 지적하면서도, 동시에 그 자신들은 자본주의의 수혜를 받고 있는 모순적 상황에 직면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모순 때문에 지배계급으로부터는 '잠재적 배신자'로, 프롤레타리아에게는 '동조자'로 인식되면서, 그 모순 속에서 싸우고 있는 지식인은 단순히 '남 일에 참견하는 사람'으로 비판받는 경우가 비일비재하다는 것이 사르트르의 생각이다. 사르트르에 따르면, 지식인은 특정 계급의 이해를 대표하기 위한 존재가 아니라, 자신의 모순을 극복하기 위해 그 모순에 맞서는 역사적 존재이다. 따라서 자신의 계급적 위치와 추구하는 '보편성'에 대해 끊임없이 재고해야하며, 그렇지 않은 전문가는 사이비 지식인에 불과하다. 결국 사르트르는 지식인이 프롤레타리아가 추구하는 '보편성'을 추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조선시대 500년을 뭉뚱그려 보자면, 적어도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이런 모순과 마주할 일이 거의 없었다. 조선의 지식인들은 공부가 곧 인격도야요,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길이었다. 그들은 공부한 바를 관직에 올라 바로 국가와 사회를 위해 활용할 수 있었다. 지금은 어떠한가? 현재 한국에서 이른바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은 곧 인간이 인간답게 사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가를 깨닫는 과정이자, 인문학이 대부분의 사회 문제에 철저히 무용하다는 것을 확인하는 과정이다. 게다가 당장 생계를 걱정해야 한다. 조선시대처럼 전문가, 학자가 곧 관료인 시대는 지났고, 전문가가 지식인으로 설 수 있는 다른 공간마저도 자본이 잠식해가고 있다. 이미 많은 분야에서 인문학은 심심치 않게 잘 팔리는 문화 상품의 하나다. 인문학 공부, 역사학 공부를 통해 대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이런 상황에서 ‘재미’라는 대답은 너무도 순진한 대답이 아닐까?

자신의 경제적 토대에 대해, 자신의 계급적 성격에 대해 자각한 뒤에도 여전히 역사를 공부하는 이유가 ‘재미’뿐이라면, 그것은 단순히 스스로의 인문학적 취향을 만족시키고 지적 허세와 사기를 위한 공부라고 할 수 있다. 자신의 경제적 토대를 외면하지 않고, 사르트르가 말한 모순과 맞설 수 있으려면, ‘재미’보다는 더 크고 정치적인 대답이 이루어져야 한다. ‘재미’는 정치적으로도 계급적으로도 매우 중립적인 대답이지만, 역설적으로 그렇기 때문에 매우 정치적이고 계급적인 대답이기 때문이다. 다시 한 번 스스로에게 물어보자.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

역사학은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실례들을 연구하는 학문이다. 물론 자신과 세계, 그리고 다른 인간이 서로 긴밀하게 연결되어있다는 것을 딱히 역사학이라는 것을 공부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다. 하지만 한 인간 개체가 자신을 둘러싼 모든 관계망에 시종일관 촉각을 곤두세우는 것은 인간의 능력상 불가능하기 때문에 인간은 그러한 관계의 일부를 잊어버리곤 한다. 또는 자신의 편의와 이익을 위해 그러한 관계의 일부를 무시해버리기도 한다. 역사학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 사이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는 실례들을 다양한 시·공간에서 찾아내어, 사람들이 그것을 잊거나 무시하지 않도록 환기하는 역할을 할 수 있다. 현대 사회의 많은 문제들이 관계에 대한 망각과 무시에서 오기 때문에,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 사이의 관계를 드러내는 역사학의 역할은 그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또, 나아가 지금 맺고 있는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의 관계맺음이 다른 방식으로도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마르셀 모스의『증여론』은 이러한 생각의 바탕이 되는 텍스트이다. 모스는 이 텍스트를 통해 인간 사이의 관계가 단순히 합리적이고 경제적인 관계로 이해되고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말한다. 이른바 근대 경제학이 바라보는 인간관계는 인간과 인간 사이의 관계를 바라보는 하나의 특수한 관점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역사학은 인간과 인간, 인간과 세계가 서로 어떠한 관계에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일종의 선택지를 제공할 수 있다. 다시 말해, 다른 관계맺음으로는 어떤 방식이 있으며, 그것이 어떻게 가능한지, 그리고 그것을 어떻게 이루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줄 수 있다는 것이다.

역시 아무래도 좋은 대답은 아니다. 아직 역사와 역사학에 대한 이해가 조야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이렇다 할 연구 성과가 없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여전히 보여주는 것 이상, 즉 역사학을 통해 일정한 실천력을 담보할 수 있는 영역까지 고민이 확장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역사학적 연구 성과를 보여주는 것만으로는 자신과 사람들의 인식을 바꾸어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그것만으로 사회적 문제들에 참여하고 정치적인 해결을 이루어낼 수는 없다. 역사학의 한계일 수도 있다. 아니, 인문학의 한계일 수도 있다. 하지만 공부를 통해 인간이 좀 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내겠다는 너무도 높은 이상마저 없다면, 힘들여 공부를 하는 이유를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어쩌면 손에서 연필을 놓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왜 역사를 공부하는가?”에 대한 마음에 드는 대답을 찾아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우선 지금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글쓴이 자신이 부르주아 먹물 근성에 빠져있고 언제든지 거기에 함몰될 가능성이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재고하면서, 이렇게 글을 싸질러 글쓴이의 위치를 지속적으로 확인해보는 것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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